반추反芻 (완결)

in #kr7 years ago



반추反芻 (완결) - 비의 추억

“태식아! 태식아!”
희미해진 시야로 어머니와 형 태근의 모습이 보였다.
태식은 침대의 시트를 움켜쥐고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자신의 왼쪽 다리에는 허벅까지 깁스가 되어 있었고 가시덤불 위에 있는 것처럼 온 몸에 통증이 밀려 왔다.
“문희는… 문희는요.”
태식의 어머니는 얼굴을 돌렸다.
“중환자실에 있다.”
태근이 형이 대답을 대신했다.
“데려다 줘요.”
“안 돼, 지금 볼 수 없다.”
“데려다 달란 말이야! 데려다 줘!”
태식은 울부짖었다. 당장 문희를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리에서 쏟아지던 피가 자신의 심장에서 용솟음치고 있음을 느꼈다.
“안 돼! 태식아 조금만 기다려라. 문희가 아직 의식이 없다.”
“데려다 달란 말이야. 데려다 달란 말이야.”
태식은 자신의 팔에 꽂아 놓은 링거 줄을 뽑아내었다. 이미 태식은 자신의 통증은 의식하지 못한 채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래, 알았다. 내가 가서 부탁을 해보마.”
태근이 형은 곧바로 병실 문을 나갔다.
“어쩌다, 어쩌다 그랬어! 이놈아!”
“엄마-”
태식은 어린애처럼 어머니를 부르며 울부짖었다. 태식의 머릿속에서는 온통 문희의 모습만 가득 차 있었다.
잠시 후, 태근이 형과 함께 의사가 들어 왔다.
“의사 선생님! 문희에게 데려다 주세요. 네 문희에게 데려다 주세요.”
“죄송합니다. 진정하십시오. 마음은 알겠지만 이러는 것은 환자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새끼야! 데려다 달란 말이야! 난… 문희 옆에 있어 주어야 한단 말이야.”
태식은 의사의 가운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의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태식은 몸부림을 쳤다. 어머니와 태근이 형이 말렸지만 아무도 태식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여보세요. 지금 문희씨는 아주 위독한 상태입니다. 저희로서는 최선을 다 하고 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두개골의 손상이 심합니다. 그리고 폐도 많이 손상되어 있는…”
“이 보세요.”
의사의 말에 태근은 버럭 화를 내었다.
“의사 선생님 데려다 줍시다. 부탁합니다.”
의사는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로서는 이것으로 인해 발생되는 환자의 또 다른 상황에 대해 책임지지 못하겠습니다. 먼저 환자의 가족에게 책임이 있다는 서명을 해 주십시오.”
“좋습니다.”
의사는 다시 태근과 병실 문을 나섰고 태식은 여전히 울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 태근과 간호사가 이동용 침대를 가져와 태식의 침대 옆에 바짝 붙였다. 그리고는 태식을 들어 올려 이동용 침대에 올렸다.
병원의 천정이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태식은 마치 끝없이 펼쳐진 복도를 지나는 것처럼 지루함을 느꼈다. 엘리베이터로 옮겨진 태식의 몸이 잠시 공중으로 뜨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내려앉으며 땅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중환자실은 응급실이 있는 복도 맞은 편 끝에 위치해 있었고 태식의 아버지는 그곳에 서 있었다. 태식의 침대가 마침내 중환자실로 들어섰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문희의 모습은 얼굴조차 볼 수 없을 정도로 산소호흡기와 갖가지 호스로 덮여 있었고 그녀의 젖가슴 밑으로 뚫려진 구멍에서는 노란 고무호스가 꽂혀져 있었다.
머리맡의 비닐주머니에 담겨진 붉은 피가 호스를 타고 그녀의 팔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문희야! 문희야…”
태식의 흐느낌에도 문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한 그녀의 손은 하얀 시트 위로 가지런히 놓여 져 있을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만, 나가시죠.”
의사의 말에 태식의 어머니와 아버지 태근이 형은 말없이 병실 문을 나섰다.
“소리를 지르거나 환자를 잡아서도 안 됩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하면 당장 다시 원래 병실로 옮기겠습니다.”
의사는 판에 박힌 말을 중얼거렸지만 이미 태식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귓가에 문희와 함께 맞았던 빗소리가 가득히 채워지고 있었다.
어느덧, 병실 위에 조그마한 창문으로 어둠이 찾아 들고 있었다.
태식은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문희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희의 머리맡에 걸린 주머니에서 관을 타고 벌겋게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이 거의 바닥났을 무렵, 문희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태식은 안간힘을 써서 문희의 손을 잡았다. 통증이 손끝으로 몰려드는 듯 했다.
태식의 손에 쥐어진 그녀의 작은 손이 심한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마른 잎새처럼 힘없이 꺾여 졌다. 순간 알 수 없는 기계에서 신호음이 울렸고 그와 동시에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들이 닥쳤다.
“문희야! 죽으면 안 돼! 안 돼!”
“빨리 데리고 나가!”
의사 한 명이 태식을 가리키며 말했고 두 명의 간호사가 태식의 침대를 끌어 당겼다. 그리고는 문희의 침대 쪽으로 여러 명의 의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안 돼! 이 개새끼야! 제발 문희 옆에 있게 해줘!”
태식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간호사에 의해 밀려나온 태식의 침대가 중환자실 문을 막 나설 무렵, 뒤에서 의사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중환자실을 빠져나온 태식의 팔위로 누군가가 주사기를 꽂았다. 희미해지는 세상, 희미해지는 문희의 기억을 태식은 필사적으로 더듬었지만 그의 의식은 점점 흐릿해 지고 있었다.
그해 8월, 끊임없이 비가 쏟아졌고 문희는 빗물처럼 태식의 가슴 속으로, 기억 속으로 황톳빛 얼룩을 만들며 스며들고 있었다.

봄의 기억을 깨우며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 속으로
가시관을 쓴 채 걸어가는 그대여
어느 찬 바람 기슭에서 행여 쉴 곳 찾거든
젖은 노래로 나를 부르라

작은 흔들림에도 하얗게 흩어질
그대 발자국 따라 조심스럽게
은밀한 마음 감추며 가리니
불꽃되어 이는 슬픔 휘파람에 감추인다

아무도 모르게 마른 이별 묻어두고
철새처럼 날아가는 기억 너머
외로이 떨며 기다린 까마득한 겨울
이미 푯대같은 그리움 잉태하였으니

굳은 마음 속에 태동일어
묻어둔 약속 움틀대는 꿈을 꾸면
나그네 머리맡에 붉게 피는 새벽 길
이슬이나 되어 너의 꽃잎 적시리니

그동안 '반추'를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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