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PXs의 One Shot One Kill_#5] 변기 속에서 진주를 꺼내는 심정으로 - 이재용의 <여배우들>

in #kr7 years ago

나는 이미 오래전에 대중의 마음을 이해하는 걸 포기했다. 그들의 취향은 변덕스러운데다 일관성이 없다. 어마어마한 소설이나 영화가 압도적인 무관심 속에 가라앉는 걸 볼때마다 나는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스티밋에서도 글의 수준과 보상의 합당함에 대해 종종 논란이 제기되는데, 원래 세상이 그런거 아닌가? 니체나 카프카, 고흐 조차도 그렇게 살다갔거늘... 고귀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그런 일이 절대 벌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면 기술의 힘과 인간의 본성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여배우들>은 2009년에 개봉해 50만명이 겨우 넘는 관객수를 확보했다. 워낙 저예산이라 이 정도면 준수한 성적이라고 하는데, 나 원 참, 성공의 정도를 작품의 수준이 아니라 예산에 맞춰 설명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나. 상업 영화의 틀을 쓰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치자. 하지만 작품의 수준으로만 따지면 이 영화는 500만이 봤어도 한참은 모자랐다.

나는 지금 변기 속에서 진주를 꺼내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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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은 <정사>라는 영화로 데뷔해 <순애보>를 만들었고 2003년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욘사마를 주연으로 <조선남녀상열지사: 스캔들>을 찍었다. 후에 김옥빈 주연의 난해한 영화 <다세포 소녀>를 연출했는데, 그로부터 3년 뒤 자신이 만났던 여배우들을 한 자리에 모아 이 영화를 만든다.

그의 필모그라피를 나열하는 이유는 작품과 작품 사이의 연관성을 찾기 위함이다. <정사>와 <스캔들>에선 이미숙과 전도연의 베드씬이 큰 화제가 됐고 <다세포 소녀>는 혜성같이 등장한 김옥빈의 과감한 연기 도전으로 주목을 받았다. 대체로 여배우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이재용에겐 여배우들의 감성을 이해하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배우가 여섯 명이나 나오는 영화를 찍을 수 있었을까? 그것도 어설픈 배우가 아니다. 각각 자신의 세대를 대표하는 대배우, 김옥빈, 김민희, 최지우, 고현정, 이미숙, 윤여정이 출연한다. 여섯 명의 여배우들과 동시에 작업한다는 건 감독에게도 힘든 일이겠지만 배우에게는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여배우아닌가! 평생을 하이라이트만 받아왔던 그들에게 시선의 분산은 괴롭고도 불길한 저주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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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VOGUE 화보 촬영 현장을 무대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촬영 현장을 '촬영'하는 영화. 때문에 카메라는 making film처럼 거침없이 흔들린다. 앵글도 엉성하다. 그 대단한 배우들의 얼굴이 더블(한 배우가 다른 배우를 가리는 현상)이 되는가하면 조명이 너무 어두워 표정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의 전략이다. 그들을 예쁜 인형으로 보는 건 VOGUE의 카메라에 맡겨두고 영화는 무대의 뒤편, 여배우들이 가식을 벗고 평범한 여자로 돌아가는 뒷골목을 포착한다. 화면 곳곳에 배어 있는 진솔한 냄새. 꾸며진 무대에선 절대 맡을 수 없는 진귀한 향들이 담백하게 전해진다.

영화의 백미는 애드립인지 각본이지 알 수 없는 대사들이다. 이재용이 상황을 제시하고 배우들이 즉흥적으로 연기를 했다고 한다. 혹시 몰라 각본을 준비했을 수는 있지만 배우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를 보고 당장에 갖다 버렸을 것이다. 그들의 대사는 농밀하고, 리얼하고, 순수하다. 짜여진 말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현실감이 뿜어져나온다(영화의 크레딧엔 여섯 명의 이름이 각본으로 올라온다).

특히 윤여정과 이미숙의 연기는 쟁쟁한 젊은 여배우들을 압도한다. 그들이 풀어놓는 삶의 두께과 고통은 과연 무엇이 대배우를 만드는지 깨닫게 해줄 정도였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고현정이 꺼내고 이미숙이 끌어 올린 뒤 윤여정이 마무리하는 '이혼에 대한' 고백이다. 그 동안 말하지 못했던 설움에 고현정은 북받쳐 울었고 이미숙은 오랫동안 잊어온 일을 새삼스레 깨달은 사람마냥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상처위의 상처위의 상처들이 굳은 딱쟁이를 이뤄버린 윤여정은 담담하게, 그러나 부드럽게 그들을 타일렀다.

이게 과연 연기일까?

그 까탈스럽던 여배우들은 눈물을 통해 비로소 하나가 된다. 오만과 가식, 허영과 질투가 덕지 덕지 매달려 있는듯 보였지만 결국엔 같은 고민을 짊어진 동료였던 것이다. <여배우들>은 영화를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배우에, 여자라는 명찰까지 달고 살아온 Old Lady가 앞으로 똑같은 삶을 살아갈 Young Lady에게 보내는 위로의 편지였다. 배우들은 가면을 벗고 인간대 인간, 여자대 여자로서 서로를 받아들였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건 절대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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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못봤어요. 괜히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꼭 보고 싶어졌습니다. 주말에 볼게요.

어깨에 힘 쭉 빼고 편하게 누워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물처럼 흐르는 장면들의 맛이 무척 담백할 거에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중에 하나입니다. 영화라고 하기엔 너무나 사실적이었던.. 실제로 고현정과 최지우는 기싸움하는 씬을 찍으며 처음 만났다고 하는데 분위기 묘했다고 하더군요. 여배우의 애환과 그들의 비하인드씬을 곁에서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영화입니다.

저도 정말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앞으로 나는 참 좋았는데 흥행에 실패한 영화들을 하나씩 꺼내 소개해볼까 합니다. 그나저나 이재용은 참 대단한 거 같애요. 요즘 활동은 신통치 못하지만요.

우와 바로 보고싶네요. 추천 감사합니다.

근데 구글 플레이에 조차 없네요... 이 영화 어디서 찾아야 할지...

ㅎㅎ 벌써 봤어요. 그냥 다시보기 하면 요즘은 왠만한 영화 다 볼수 있거든요. 영화 힘들게 제작하는 사람들한텐 너무 미안하지만,,, 이것도 시스템이 빨리 바뀌길 바래야죠.
너무 재밌게 봤어요. 간만에 영화보며 깔깔댔네요 ㅎㅎ

공감해요 :) 배우들 끼리의 신경전만 그린게 아니라 동질감, 그안에서의 위로 라는말...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죠 !

어색하게 시작해서 행복하게 끝나죠. 이런 영화는 찍는 과정도 행복할거 같애요.

저도 이 영화 봤는데... 굉장히 리얼하다는 느낌이었어요. 감독의 필모그라피를 알고 봤다면 좀 더 집증해서 봤을텐데 아쉬움이 남네요. 정사와 스캔들을 참 재밌게 봤는데...

정사랑 스캔들 재밌게 보셨으면 확실히 연세가 좀 ㅋㅋㅋㅋ 그 감성이 젊은 감성은 아니었죠

ㅋㅋㅋ 연세까지는 아닌데요

대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걸그룹이 좋은 노래를 부르면서 헐벗고 다니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이 헐벗고 노래한다고 해서 좋은 노래가 나빠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제 제가 벗으면 되는 건가요? 벗으라 하시면 벗겠어요.

어후, 너무나도 소화가 잘 되는 글이네요.
한 숟가락 떠먹어볼까 했는데, 정신차려보니 어느새 한통을 싹 비웠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참신한 표현, 한 수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