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에 도전한다? (1/3)

in #kr7 years ago (edited)

뉴비 철학자입니다. 요즘 노벨문학상 후보로 매년 거론(누구에 의해?)되는 시인이 추문에 휩싸여 있습니다. 저는 시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노벨문학상'에 대해 말해보려 합니다.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기보다 자료를 찾아 정리한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총 3편으로 나누어 포스팅합니다.


노벨 문학상에 도전한다? (1/3) - 이번 글

노벨 문학상에 도전한다? (2/3)

노벨 문학상에 도전한다? (3/3)


* 전체 차례:

1. 노벨상의 유래 - 2. 노벨 문학상, 그 권위에 도전한다 - 3. 노벨 문학상의 평가 기준 

 4. 노벨 문학상의 선정 과정 - 5. 노벨 문학상 선정 기관, 스웨덴 한림원(아카데미) - 6. 노벨 문학상을 둘러싼 정치성과 문학성, 그 영원한 갈등

7. 노벨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 - 8. 한국 문학의 반성 - 9. 한국 문학, 노벨 문학상에 도전한다


** 당신은 다음 이름들을 알고 있습니까? 쉴리 프루돔, 테오도르 몸센, B. 뵈르손, F. 미스트럴, J. 에체가라이, H. 센키에비치, 러디어드 키플링, 루돌프 오이켄, S. 라게롤뢰브, 하올 하이제.... 그러면 다음 이름들은 어떻습니까? 레오 톨스토이, 앙드레 말로,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하디, 죠셉 콘래드, 헨리 제임스, 안톤 체홉, 마르셀 프루스트, 프란츠 카프카, D. H. 로런스, 버지니아 울프, 폴 클로델, 로베르트 무질, 베르톨트 브레히트, 그레이엄 그린, 에즈라 파운드, R. M. 릴케, 폴 발레리, 니코스 카잔차키스, 쌩텍쥐페리....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려드리지요. 앞에 언급한 사람들은 1901년부터 1910년까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사람들이고, 뒤에 언급한 사람들은 노벨 문학상을 타지 못한 20세기 문학가들입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요? 이제부터 3회에 걸쳐 그 비밀을 풀어가 보도록 합시다. 이런 검토를 통해 우리는 노벨 문학상을 어떤 자세로 바라보아야 하며 우리의 문학적 작업을 어떻게 실천해가야 할지 모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노벨상의 유래


문학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나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문학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일지라도, 늦가을 어느 날 북유럽의 먼 땅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전해오는 노벨상 수상자 발표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노벨상은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자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제정된 것으로 원래 평화상만을 설정했다가,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문학상으로 확대되어 총 다섯 개 부문에 걸쳐 수상자가 정해지게 된다(후에 경제학상이 추가되어 지금은 여섯 개 부문에서 수상자가 나온다).


노벨은 자신에게 막대한 재산을 안겨 주었던 다이너마이트, 젤라틴 화약 등의 폭탄이 자신이 원래 의도했던 평화적인 목적(경제 개발, 도로 공사, 광산 작업 등)에 쓰이지 않고 전쟁용 무기로 사용되는 것에 몹시 개탄했다(돈은 챙길 만큼 챙겼으면서 어인 코스프레). 어릴 때부터 문학적인 감수성이 예민했으며 평생 동안 동서고금의 고전들을 즐겨 읽었던 노벨은 이런 사태에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자신이 번 돈 모두를 기금으로 하여 인류의 평화와 복지 증진에 '가장 위대한 공헌'을 한 사람들을 선택해서 막대한 상금을 주도록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노벨상은 현대에 가장 큰 권위를 갖는 상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그것은 국력의 척도로 인정받기까지 한다. 즉 한 나라가 노벨상 수상자를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그 나라의 국력을 나타내준다는 얘기다. 노벨상은 권위도 권위지만 그 권위를 뒷받침할 수 있는 막대한 상금으로 인해 더더욱 유명하다. 노벨이 죽을 때 남긴 기금을 관리해서 생긴 돈(당시 돈 9백만 달러)이 상금으로 지급되고 있는데, 기금 운용 상황에 따라 매년 액수에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그 액수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벨 문학상을 보자면 1991년도 상금이 100만 달러를 웃돌고 있다. 노벨상의 수상자가 되면 단번에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노벨상은 그 권위와 상금 규모로 말미암아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매력을 갖고 있다.


노벨상 시상식은 매년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 스웨덴 국왕이 자리한 가운데 스톡홀름에서 거행된다. 늦가을이 되면 노벨 문학상을 필두로 해서(매년 10월 셋째 목요일 발표) 각 부분 노벨상 수상자의 명단이 차례로 발표된다. 우리나라도 노벨상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수상자가 발표될 때마다 언론에서는 수상자들의 경력과 업적을 대서특필하면서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묻곤 한다. 이 일은 매년 되풀이된다.


특히 우리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분야가 바로 노벨 문학상이다. 우리 나름대로는 세계에 내놓을 만한 작가를 충분히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데, 이웃 일본에서도 두 번이나 탔다고 하는데(1968년의 가와바다 야스나리, 1994년의 오에 겐자부로), 왜 우리는 아직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들이 거듭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풀 수 없는 의문일까. 아니면 이런 상황 속에 어떤 다른 이유들이 숨어 있는 것일까. 노벨 문학상의 역사를 살펴보고 거기에 숨어 있는 비화들을 알아보는 작업은 우리의 의문에 많은 시사점을 안겨 줄 것이다. 특히나 노벨상을 꿈꾸며 문학을 하고자 하는 문학청년들에게 자신의 글쓰기를 이끌어 갈 지침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우리도 노벨 문학상을 꿈꿀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우리가 노벨 문학상을 꿈꿔도 되는 걸까?



2. 노벨 문학상, 그 권위에 도전한다


우리는 노벨상 수상 작가들의 명단을 보는 순간 당혹감을 금치 않을 수 없다. 우선 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를 보자. 평소에 문학에 꽤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열심히 문학 작품을 탐독하고 있는 독자라 할지라도 곧 자신의 무식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쉴리 프루돔, 테오도르 몸센, B. 뵈르손, F. 미스트럴, J. 에체가라이, H. 센키에비치, 러디어드 키플링, 루돌프 오이켄, S. 라게롤뢰브, 하올 하이제... 이런 이름들이 1901년부터 1910년까지의 수상자로 언급되고 있다. 기껏해야 우리는 "쿼바디스"의 작가인 센키에비치 정도만을 알고 있을 뿐이며, 다른 작가들은 정말이지 이름도 듣지 못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명단을 더 훑어 내려가다 보면 우리는 R. 타고르, 로맹 롤랑,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토마스 만, 유진 오닐, 펄벅, 헤르만 헤세, 앙드레 지드, T. S. 엘리어트, 어니스트 헤밍웨이, 알베르 카뮈, 장 폴 사르트르, 사무엘 베케트, 하인리히 뵐 등의 이름을 발견하고 안심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절반 이상의 작가들을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실의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하다. 자존심도 상하고 문학을 포기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잠시 판단을 보류해두는 편이 좋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훌륭한 작가들이 20세기에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명단에서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문학의 진정한 거봉들이라 일컬어지는 레오 톨스토이, 앙드레 말로,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하디, 죠셉 콘래드, 헨리 제임스, 안톤 체홉, 마르셀 프루스트, 프란츠 카프카, D. H. 로렌스, 버지니아 울프, 폴 클로델, 로베르 뮤질, 베르톨트 브레히트, 그레이엄 그린, 에즈라 파운드, R. M. 릴케, 폴 발레리, 니코스 카잔차키스, 쌩 텍쥐페리... 이러한 사람들은 그들의 뛰어난 문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무식함(?)에 안심해도 좋다. 우리의 무식함은 진정한 무식함이라기보다는 뭔가 다른 이유로 인해 생겨난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노벨 문학상은 작품의 문학성에 대한 평가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어쩌면 그런 생각은 단순한 추측의 차원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근거를 가진 사실로 밝혀질 것 같다. 이러한 점은 노벨 문학상의 권위에 도전했던 몇몇 작가들의 에피소드를 보면 더욱 분명해지는 것 같다.


철학자인 동시에 소설과 희곡을 썼던 1964년 수상자 장폴 사르트르는 노벨 문학상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면서 수상을 거부함으로써 막대한 상금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20년 동안 프랑스 인이 노벨 문학상을 타지 못하게 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1976년 수상자인 솔 벨로우는 '그 상을 받은 무명 작가의 대열에 끼이기보다는 차라리 상을 받지 못한 거장들의 대열에 참여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한 적이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솔 벨로우가 마지못해 수상을 승낙한 이유는 그 막대한 상금의 유혹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작가들이 수상을 승낙할 때 상금의 유혹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1962년 수상자인 존 스타인벡은 노벨상 수상이 마치 살인 사건과 흡사하다면서 '하루 이틀 신문의 기사거리로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끌다가 그 다음에는 잊혀지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노벨상이 일시적인 유행 만들기에 불과하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또한 1923년 수상자인 시인 예이츠는 노벨 문학상의 상금을 '스웨덴의 상여금'이라고 말함으로써 노골적인 비난을 숨기지 않았다.


더구나 노벨 문학상이 문학성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하게 수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리의 짐작을 더 분명히 해주는 증거가 여럿 있다. 우선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가운데에는 문학가가 아닌 사람이 여럿 있다. 루돌프 오이켄(1908년 수상), 앙리 베르그손(1927년 수상), 버틀런드 러셀(1950년 수상), 장폴 사르트르(1964년 수상)는 철학자이며, 테어도르 몸젠(1902년 수상)은 역사학자이고, 윈스턴 처칠(1953년 수상)은 역사학자이며 정치가(그는 노벨 문학상 수상 당시 영국의 현직 수상이었다)인 것이다. 이들의 작품이 얼마나 문학적인지에 대한 논란은 접어두더라도 이들보다 뛰어난 철학자나 역사학자가 수상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우리의 판단을 혼란스럽게 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3천년의 문학적 유산을 지닌 중국에서는 20세기 내내 한 사람의 수상자도 나오지 못했다(중국 정부와 스웨덴 한림원의 모종의 정치적 거래 끝에 2012년에 모옌(莫言)이 수상해서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중국 문학의 문학성이 세계적인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든지 중국 문학이 인류에 공헌한 바가 없다든지 하는 얘기는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비운을 겪은 나라가 비단 중국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국가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수를 보면 이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1901년 첫 수상자가 선정된 이래로 2000년까 모두 29개국에서 수상자를 배출했는데(참조), 그 대부분은 프랑스, 미국, 스웨덴, 영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소련의 8개국이 독식했다. 이들 국가들은 누가 보더라도 20세기에 세계를 제패한 최강대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스웨덴은 예외라고 할 수 있는데, 노벨상을 선정하는 국가가 바로 스웨덴임을 감안한다면 스웨덴이 그렇게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것(영국, 독일을 제치고 자그마치 3등을 차지하고 있다)이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 일이다.


여기에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물론 독자들이 알고 있지 못할 것이 분명한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E. 욘손과 H. 마르틴손은 1974년에 공동으로 수상했는데, 그들은 단지 스웨덴 국적일뿐만 아니라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기관인 스웨덴 한림원(아카데미)의 18명 종신 회원이었다. 이 해 수상자가 발표되기 전에는 아무도 이들의 수상을 점치지 못했는데, 심사 과정에서 점점 유력한 후보자로 얘기되다가 마침내 높은 문학성을 인정받으면서 당당히 노벨 문학상의 영예(?)를 공동으로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스웨덴 언론마저도 이러한 처사에 대해 '그것은 당연히 영국의 그레이엄 그린이나 터키의 야사르 케말에게 돌아갔어야 마땅하다'라고 맹렬히 비난했으며, 이러한 사태로 말미암아 노벨 문학상이 내세우는 권위는 한층 더 실추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선진국들이 노벨 문학상을 독식하는 현상에 대한 세계적인 비난 여론이 일게 된 것은 1960년대에 와서이다. 이제 스웨덴의 한림원은 세계 여론의 눈치를 보게 되었으며, 그 결과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아랍을 비롯한 소위 제3세계에도 수상자를 분배(?)해주는 호의를 베풀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실은 앞의 참조 링크를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문학 외적인 관계 때문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결정되곤 하는 일이 1960년대에 와서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사실상 그 이전에도 노벨 문학상의 정치적 성격은 논란이 되어 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독일이 강세를 보이다가, 전쟁 이후에는 미국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정치적으로 나라가 강성해지면 갑자기 좋은 문학자가 나온다는 증거를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또한 사르트르의 수상 거부 이후에 20년 동안이나 프랑스에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사르트르 이후에 프랑스 문학이 갑작스레 퇴락했다는 증거는 아무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와 관련된 더 깊은 문제는 뒤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3. 노벨 문학상의 평가 기준


'인간이 제정한 모든 상은 흔히 공정성을 잃기가 쉽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노벨 문학상의 심사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노벨 문학상은 심사위원들이 마음대로 줄 수 있는 상에 불과한가. 아니면 그 나름대로 내적이고 일관된 기준을 가진 문학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실 노벨 문학상의 선발 방식은 여타 부문의 선발 방식과 많은 부분 흡사하다. 일차적으로 후보자의 지명은 문학적으로 탁월함을 의심할 수 없는 전문가들이 하게 된다(이 점은 뒤에서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하지만 수치로 업적을 금방 분별해내는 것이 가능한 과학 부문에서와는 달리 문학 작품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기 쉽다. 어쩌면 바로 그 점이 문학과 예술이 갖는 고유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일례로 현대 서양 미술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은 권위주의적인 당대 화단의 농간 때문에 별로 평가받지 못했다. 마네, 모네 등 인상파의 거장들은 '낙선 작품 전람회'에 작품을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고는 해도, 막대한 상금과 권위가 문제가 될 때 평가의 기준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우리는 노벨이 남긴 유언 속에서 수상자의 선정 기준을 찾아볼 수 있다. 노벨은 '이상주의적 경향의 가장 탁월한 작품에 대해 매년 시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렇듯 분명한 기준을 노벨 자신이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은 '이념적 경향'(또는 '이상주의적 경향')이라는 구절이 충분히 마음대로 해석될 여지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유언 내용을 그들 나름대로 해석해버렸다.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한림원 회원들은 현실성, 현대성을 가진 작품을 결코 선정하려 들지 않았다. 특히 심사위원들은 노벨의 유언 속에서 '이념적(理念的)'이라는 스웨덴어 'idealisk'를 '이상주의적'이라는 뜻의 스웨덴어 'idealistik'이라고 판단해버렸다. 앞서 언급된 20세기 거장들이 노벨 문학상을 타지 못한 이유로 가끔 제시되는 것이 바로 이 '이념적/이상주의적 경향'이라는 구절이다. 노벨 재단의 유렌스틴 교수는 이 구절을 '인류 공동의 선(善), 그리고 인간다움과 상식, 진보와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도 여전히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해석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전통적으로 심사위원들은 이 구절을 '그들 자신들이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 덕성, 품성 및 국가, 교회, 가족, 도덕에 대한 충실성' 정도의 의미로 해석했다. 그렇기 때문에 회의주의적, 운명론적, 비관론적, 현실 참여적인 작가들은 이상주의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수상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톨스토이, 입센, 졸라 등이 거부되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노벨 자신은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었을까. 게오르크 브란데스가 노벨의 측근에게 이것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는데, 그 얘기를 담고 있는 서한이 1960년대 중반 공개되었다. 거기에 따르면 대자본가인 노벨은 철저한 무신론자이며 무정부주의자였는데, 그는 '종교, 군주제, 결혼, 사회 질서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의미로 '이념적/이상주의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만약 이 주장이 맞는 것이라면 스웨덴 한림원은 애초부터 아예 잘못된 해석을 바탕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해 옴으로써, 그 상을 설립한 사람의 애초 의도에서 아주 벗어난 행위를 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 점을 확인할 수는 없다. 차라리 우리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결정되기까지의 과정과 수상자를 결정하는 사람들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이 상을 둘러싸고 있는 의문들을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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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개발한 다이너마이트가 평화적인 목적에 쓰이지 않고 전쟁용 무기로 사용되는 것에 개탄했다'는 것조차 신화인 것 같습니다. 말년에 군사용 폭약인 발리스타이트를 개발, 집요한 로비 끝에 특허를 얻고 당시 후발 강대국이었던 이탈리아 정부에 의탁해 토리노에 공장을 설립한 후 죽을 때까지 5년을 이탈리아의 휴양지 산 레모에서 살았으니까요...^^ https://busy.org/@hermes-k/cryptocurrency

맞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코스프레'라고 살짝 비꼰 겁니다.

모르는 작가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자괴감에 빠져들 무렵,
"이제 우리는 우리의 무식함(?)에 안심해도 좋다"에 안도하고 가는 1인 입니다. ^_^

하하, 제가 글을 잘 쓴 거로군요!

아, 이런 글 너무 좋습니다. :) 노벨문학상에 대해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글만 읽어도 상식이 풍부해지는 기분이 드네요!

고맙습니다.